이웅평 보상금, 아파트 78채 값인데 단 한 푼도 안 썼다?
1983년, 북한 공군 조종사 한 명이 미그-19 전투기를 몰고 남한 하늘로 넘어왔습니다. 전국에 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렸고, 사람들은 전쟁이 났나 싶어 벌벌 떨었다는데요. 근데 알고 보니 귀순이었던 거죠. 그 주인공이 바로 고(故) 이웅평입니다.
SBS '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'(꼬꼬무)에서 이웅평의 삶이 다시 조명됐는데, 솔직히 방송 보면서 여러 번 멈칫했습니다. 이웅평 보상금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서 특히요.
이웅평 보상금은 얼마였을까? 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?
| 귀순 시기 | 1983년 |
| 귀순 수단 | 북한 미그-19 전투기 |
| 이웅평 보상금 | 15억 6,000만 원 |
| 당시 아파트 환산가 | 고급 아파트 약 78채 |
| 사망 시기 | 2002년 (간경화) |
| 보상금 사용 여부 | 한 푼도 사용하지 않음 |
위 표를 보면 이웅평 보상금이 단순히 큰 돈이 아니라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규모였다는 게 느껴지는데요. 고급 아파트 78채 값이면 지금 시세로는 상상도 못 할 금액이죠. 근데 이게 단 한 푼도 쓰이지 않았다는 게 핵심입니다.
귀순을 결심하게 만든 건 — 라면 봉지 한 장
이웅평이 귀순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의외로 소소한 물건이었다는 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. 북한 해변에서 우연히 발견한 남한 라면 봉지였는데요. 거기에 적혀 있던 문구가 "변질이나 훼손된 제품은 교환해 준다"였다고 합니다.
북한에서 교육받아온 남한의 이미지와, 그 평범한 라면 봉지에 쓰인 소비자 보호 문구 사이의 간극. 그게 이웅평의 마음을 흔들었던 거죠. 사실 저도 이 부분 들으면서 "아, 이런 작은 것 하나가 사람 인생을 바꾸는구나" 싶었거든요.
이웅평이 '반공 아이돌'로 불린 이유 — 연간 900회 일정
| 당시 전두환 대통령 | 약 600회 |
| 이웅평 | 약 900회 이상 |
| 여의도 행사 참관 인원 | 150만 명 |
위 표에서 보듯이, 귀순 직후 이웅평은 그야말로 대스타였습니다. "대통령보다 이웅평이 더 바쁘다"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.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행사에 무려 150만 명이 몰렸다는 건 지금도 믿기지 않는 숫자이기도 하구요.
이웅평 보상금을 쓰지 않은 진짜 이유 — 죄책감과 통일의 꿈
이웅평 보상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은 이유, 방송에서 공개됐는데요. 이웅평은 자신의 귀순으로 인해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이 고통받았을 거라는 죄책감을 평생 갖고 살았다고 합니다.
언젠가 통일이 되면, 그 돈을 가족들을 위해 쓰겠다는 생각으로 손 하나 대지 않았던 거죠. 근데 더 안타까운 건, 그 이후 북한에 있던 누나가 정치범수용소에서 힘든 생활을 했고 가족들이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는 겁니다. 이걸 들었을 때 이웅평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...
이웅평 결혼 생활 — 신혼집도 공군 관사, 도청 장치까지
귀순 이듬해인 1984년, 이웅평은 박선영 씨를 만나 결혼했습니다. 박 씨 가족들이 반대했지만 만난 지 4개월 만에 결혼을 강행했는데요. 박 씨가 부모에게 "나를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낫다"고 설득했다고 하더라고요. 이 말이 참 마음에 남았습니다.
하지만 신혼 생활은 평범과 거리가 멀었습니다. 북한의 보복을 우려해 신혼집을 공군 관사에 마련해야 했고, 결혼 약 1년 후에는 집 안에서 한국 정보기관이 설치한 도청 장치까지 발견됐다고 합니다. 박선영 씨는 이에 항의해 이혼을 선언하고 상부와 대치하기까지 했다고 밝혔습니다.
이웅평의 마지막 — 2002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다
이웅평은 젊은 나이에 간경화를 앓았습니다. 수술 후 한때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, 결국 200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.
"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. 안 해도 될 고생 참 많이 했다. 고마웠다."
그리고 아이들을 잘 길러달라는 부탁도 남겼다고 하는데요. 이웅평 보상금은 결국 통일을 기다리다 주인을 잃어버린 셈이 됐습니다.